아침 단상 단상

신새벽, 독서실 문 열고 주변 청소하다. 겨울답지 않은 따스한 날씨,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영락없는 봄비다. 오전이 다 가건만 아내는 늦장이다. 그러겠지. 휴일만이라도 좀 쉬고싶겠지. 요즘은 하루하루가 긴장과 분주함의 연속이다. 

프루스트 1권 250쪽 펴들다. 며칠째 <스완네 집쪽으로>에서 머물고 있다. 프루스트만큼은 서둘고 싶지 않다. 천천히 호숫가를 산책하듯 조금씩 맛보고 즐기며, 한가하게 읽을란다. 김이 모락모락, 커피메이커에서 맛좋은 커피향이 풍긴다. 독서실 건너편 감나무 두 그루, 잎새 떨어진 앙상한 가지, 겨울비, 방울방울 맺혔다. 

독서회건으로 L씨에게 전화걸다. L씨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시나 읽으면 몰라도 독서모임은 좀 부담스러워요. 저 빼고 다른 분들하고..." 책 읽자해도 도무지 읽으려는 이가 없다. 분주한 탓일까? 분주하기보다 마음이 끌리지 않아서 일게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괜스리 부산스럽고 안정이 되지 않은 탓이다. 어쩌랴! 눈앞의 것이 더 중요한 것을. 

토마스 알비노니의 <현과 컨티뉴를 위한 협주곡 G단조>를 오디오에 걸다. 전자랜드에서 5만원주고 구입한 저가 포터블 오디오다. 반드시 값비싼 오디오만이 감동을 주는건 아니다. 아무때나 음악을 듣기에는 오히려 포터블 오디오가 제격이다.   

금년 정기연주회 연주곡으로 베토오벤 교향곡 5번 <운명>이 선곡되었다. 이미 악보도 받아놓은 상태다. 아침 잠깐 <운명>을 들으며 악보를 살펴보다.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4분의 2박자. 지난 정기연주회를 통해 슈베르트의 <미완성>을 무난히 소화한 바 있지만, 전체 4악장인 <운명>은 대곡 중 대곡이다. 하나임으로서 상당한 도전인 셈. 더구나 베토오벤이 아닌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문제는 곡의 난이도가 아니라 단원들의 열정과 의욕일 것이다. 아마추어가 열정이 없다면 과연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오늘 읽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다시 살펴볼 대목 : 1권 262쪽~ 263쪽(동서문화사, 민희식 역) / 음악과 관련한 감각적 묘사 부분. 

공감이 가는 대목

오래전부터 그는 자신의 삶을 이상적인 목적에 맞추기를 단념하고 일상적인 만족을 추구한 데 그쳐서, 그렇다고 명확히 마음속으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삶이 변하지 않을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신 속에 고상한 사상을 품지 않게 되어 그런 고상한 사상의 실재를 믿는 것도 그만둔 지 오래였는데, 또한 그 실재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그는 하찮은 사상, 사물의 본질에 계속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는 사상 속으로 몸을 피하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 1권, 264쪽

   


하나임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 연주곡/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b 단조 미완성> 음악

      * 용량 제한으로 인해 여러 부분으로 나눠 게시함.                          

                      제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1)/ 3'36"

                            제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2)/ 6'55"

                            제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3)/ 11'

                          제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4)/ 14'36"

                          제 2악장 안단테 콘 모토(1)/ 4'20"

                            제 2악장 안단테 콘 모토(2)/ 10'07"



 

하나임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 연주곡/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Eb장조> 음악

              트럼펫 독주 / 최윤섭(클나무오케스트라 수석) 
     
                      제 1악장 Allegro



                       제 2악장 Andante
 


                     제 3악장 Allegro                

하나임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 연주곡 음악

                          성악/  S. Gastaldon <Musica Proibita,금지된 노래>/ 테너, 김명관


                            베토오벤 <에그몬트 서곡>


                            요한 스트라우스 <트러치-트라치 폴카>

                     
                            요한 스트라우스 <피지카토 폴카>

                         
                          요한 스트라우스 <천둥과 번개>왈츠

레인보우악단 정기연주회 연주곡 음악

                  2010년/ 금관5중주 <비엔나 행진곡> <타라의 테마> <더 엔티테이너>



                            2009년/ <스윗 캐롤라인> <록 앤 롤 메들리>




하나임 연습실 음악


하나임오케스트라 제 2회 정기연주회 음악

하나임오케스트라 제 2회 정기연주회(2012. 1. 14. 토/ 오후 7시, 전주'소리문화의 전당')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지난 해 1월부터 연습을 시작했으니 무려 1년여 가까이 준비한 셈인데 다행히도 주위에선 무난한 연주라고들 평가하시더군요.

이번 연주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E플렛 장조>을 연주한 솔로이스트 최윤섭씨(*군산대, 한예종/ 클나무오케스트라 수석)의 훌륭한 연주도 연주려니와 평소 동경하던 하이든의 곡을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협주를 했던 점이죠.

다음 3회 연주회는 올 6월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레퍼토리는 대곡에 속하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비롯, 몇 곡의 영화음악, 그리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트럼펫 트리오로 연주하는 <나팔수의 휴일> 이 선곡돼 나름 부담이 되지만((*3rd), 은근한 기대감으로 새해 벽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뭔가를 간절히 소망하고 준비하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것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를로이 앤더슨의 <나팔수의 휴일>을 연습하면서 막연히나마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올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요. 역시 기회는 소망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내게 주어진 처지를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만만한게 없군요. 예컨대, 악보보기나 연주 할 것 없이 오케스트라를 따라가기에 서툰 실력, 부족한 연습시간(학교, 독서실 등 이중업무), 연습 장소, 나이를 무시할 수 없는 허약한 주력, 실전 무대에서의 유난스런 긴장감 등등 하지만 비록 제반 여건이 안 좋다거나 서툴고 자신없더라도 '기회'만 부여된다면 주저하지않고 과감히 붙잡으려고 합니다. 여하튼 올 한 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땀흘리고 노력해야겠습니다. 

* 하나임오케스트라 홈페이지 http://cafe.daum.net/hanaimorchestra




프루스트와 문찬미 프루스트 깊이 읽기

오늘 하루는 <넓적빌레>와 지냈습니다. 귀가하기 전 잠깐 피시방에 들러 이 글을 쓰고있는데, 프루스트의 소설쓰기와 문찬미씨의 경향이 너무 흡사하게 느껴지는군요. 가령 1장에서 넓적빌레에 대한 추억을 녹쓴 모터에 비유한 대목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사실 소설에 잘 나타나 있듯이 모터는 농사철에나 잠깐 사용하지 않습니까?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이 모터는 비록 겨우내 헛간에 처박혀 있지만, 농사철에는 자주 기름칠을 했을 테고, 무시로 사용할 테니 반짝반짝 윤이 나겠지요. 그래서 지금은 한창 청년으로 성장한 화자는 반짝 빛나는 모터를 떠올리는 순간, 넓적빌레의 기억을, 말하자면, 수영을 하다간 잠깐 쉬기 위해 넓적빌레에 누워 해바리기를 하거나, 때로 귀에 들어간 물도 털어낼 겸, 따스한 넓적빌레의 그 평평한 바위에 뺨을 댄 채 아스라이 할머니의 태확을 바라보며 따사롭고 신비로운 몽상에 잠기곤 했겠지요. 

여기서 잠깐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1권 <스왕네 집 쪽으로>에 나오는 '프티트 마들레느 과자와 차'에 관한 유명한 삽화 장면을 잠깐 떠올려 보지요.  

"나에게 있어서, 나의 취침의 비극과 그 무대, 그밖의 것은 하나도 콩브레에 존재하지 않게 된 지 오랜 세월이 흘러간 어느 겨울날, 내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추워하는 나를 보고 나의 습관과는 반대로, 차를 조금 들게 해 주마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생각을 고쳐 들기로 했다. 어머니는 과자를 가지러 보냈다. 가리비의 가느다란 홈이 난 조가비 속에 흘려 넣어 구운 듯한, 잘고도 통통한, 프티트 마들레느라고 하는 과자였다. 그리고 이윽고 우중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죽은 나는, 마들레느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아니, 차라리 그 정수는 나의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범용한, 우연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어디서 이 힘찬 기쁨이 나에게 올 수 있었는가? 기쁨이 차와 과자의 맛과 이어져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을 한없이 초월하고 있어서 도저히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닌 듯 싶었다. 어디서 이 기쁨이 왔는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어디서 파악하느냐?"

프루스트는 프티트 마들레느 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는 순간, 문득 지나간 시절,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스멀스멀 기억 속에 다시 떠올리며 추억들을 소설 가운데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넓적빌레>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이처럼 우리가 어느 순간, 아주 작은 계기를 통해 과거의 추억을 새롭게 떠올리고, 그것을 글로 드러낼 때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로 창조되는 과정이지요. 

또한 4장에서 소년이 영주누나와 톤대섬을 향해 수영을 함께 한 것은 하나의 꿈일 수도 있고, 실제일 수도 있겠는데요(실제 이틑날 영주 누나가 죽었으니까) 이 부분 역시 꿈이 중요한 소설을 끌어가는 수단이 됩니다. 다시 말해 <넓적빌레>는 꿈과 몽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이런 점이 바로 프루스트를 떠올리게 했던 거지요. 그래서 오늘 하루, 서울대 이형식 교수의 <마르셀 프루스트>와 앙드레 모로와의 <프루스트를 찾아서>의 부분을 주의깊게 읽었습니다.

당연히 작품평에 참고하려고요. 한데 이 소설은 소년이 공포감을 느끼는 톤대섬과 털보, 영주 누나의 죽음, 검은 빌로도 천, 회색빛 이미지와 신사, 등등 죽음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소년은 할머니의 척박한 빌레깡을 보면서 한기와 비애감을 느끼기기도 하고, 때로 할머니는 힘겹게 물질을 하지만, 그 결과는 항상 보잘것없는 수확물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에서 소년은 우리네 인생의 척박함(빌레깡이 바로 그런곳이지요)을 하나하나 목격하게 됩니다. 즉, 죽음과 인생의 척박함을 동시에 알게 된다는 거지요.

저는 그래서 이 소설이 한 청년의 지난 시절의 회상을 통해, 소년이 목격한 죽음과 인생의 고단함에 대한 통과의례를 아름답게 묘사한 소설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책세상 문고중 한 권인 <죽음의 철학적 의미>라는 책을 구입해 읽기도 했습니다만, 그 책에서는 그다지 얻을 게 없더군요. 그래서 오늘 장 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읽으면서 글쓰기에 약간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일단 우리가 맞게 되는 죽음이라는 문제와 프루스트 식의 잃어버린 시간, 즉 지나간 과거의 한 편린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에 주목하게 된 거지요. 차츰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만, 제가 놀란 건, 아주 탄탄한 문장력이 너무 돋보이더군요.어제 잠간 문학서재에서 야누스의 고뇌(?)에 대한 수필에서도 느꼈습니다만, 문장력이 아주 세련되었더라구요.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토대로 작품평을 쓰려고 하는데, 과연 생각대로 잘 될지 모르겠군요. 여하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써보려고 합니다. 오늘 문찬미씨께서 제 문학서재를 직접 찾아 주시고, 게다가 작품에 대한 언급도 해주셔서 글쓰기에 좋은 참고가 되겠네요. 모쪼록 앞으로도 종종 연락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불면으로 지내시는군요. 건강에 좋지 않겠습니다. 글쓰기를 하려면 무엇보다 건강해햐 겠지요. 문찬미씨. 힘네세요. 자신감을 갖기 바랍니다. 정말 좋은 작품을 쓰고 있으니까요.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좋은 결과가 올것이라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내내 평안하시길. (퇴근길에 잠시 피시방에 들러 급하게 쓰는 글이라 다소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읽어 주십시오)

*글쓰기에 참고하려고, 해도를 꺼내서(저는 뱃생활을 합니다) 제주항을 살펴봤어요. 자양도가 실제 섬이더군요. 화자가 살던 장소는 대략 따져 보니, 애월을 지나 합덕 부근의 해변가가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해안가 바로 앞에 작은 섬과 등대가 있고요. 톤대섬은 실제로 있나요? 아니면 제주 사투리 지명인지. 허구의 섬인지요.(*2002. 1. 12)

프루스트와 문찬미의 단편 <넓적빌레> 프루스트 깊이 읽기

"사람들은 빌레를 빌레깡이라고도 불렀다. 제주도 어느 산간이나, 들이나 밭이나, 또는 해안가에 조차 이 빌레가 있었다. 말하자면 빌레는 시커먼 현무암의 돌 뿌리가 땅 속 깊이 박혀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 그것의 근원을 캐내려 한다면 용암이 흘러내린 과거로 돌아가야 할 지역에까지 이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빌레라는 말은 척박함의 대명사로 쓰였다. 우리 할머니의 진동산 밭을 예로 들어도, 그 빌레라는 것이 얼마나 땅을 척박한 박토로 만들어 버리는지, 당시 열두 살 어린아이였던 나의 마음에 그 여운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 문찬미 단편 <넓적빌레>

서두의 문장 하나만으로도 작가는 우리의 인생의 근원적인 양상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빌레, 혹은 빌레깡을 지난한, 혹은 척박한 우리네 삶을 상징한다고 가정하겠는데요, 사실 척박한 인생이란 비단 누구 한 사람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 해당할 터이니, 작가가 어느 산간, 들, 밭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겠지요.

할머니로 대표되는 지난한 삶. 그런데 이러한 우리네 삶이란 사실상 언제, 누구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용암이 흘러내린 현무암처럼 막연한 과거로 거슬러 갈 수밖에 없겠지요. 다만 한 어린 소년은 할머니의 진동산 밭에서 일찍이 삶의 험난함을 은밀히 엿보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 소년은 조숙한 아이였나 보지요? 자, 이제 어린 소년이 어떻게 해서(지금은 27세의 청년인데요) 이 빌레를 회상하게 됐는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잠깐, 소개하기 전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먼저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K씨, 혹시 이런 경험있으세요. 어느날 불현 듯, 알싸한 무슨 냄새인가가, 아니면 무심코 지나친 회색빛 건물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아니, 그보다는 길가 코스모스의 붉은 꽃잎일 수도 있겠습니다. 뭐 아무것이나 상관없어요. 그런 자그마한 사물들, 혹은 우연한 냄새 따위에서 우리는 지난 옛시절을 문득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알싸한 추억과 함께 뭔가가 발 아래에서부터 은근히 퍼져오는 느낌. 그런 야릇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신비로워서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이한 느낌인데요, 우리는 그런 것을 종종 꿈속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제 누나는 스믈세살 때 돌아가셨는데요, 저는 누나가 세상을 뜨고 나서 한동안 죽은 누나가 꿈속에 나타나곤 했어요. 그런데 꿈이 끝나고 나면 그때마다 느껴지는 그 서운함, 그런데 꿈속에서 누나와 함께 책을 이야기 읽거나 화제를 삼던 뭔가 알싸한 느낌은 너무 부드럽고 감미로운 느낌이라서 소중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바로 이러한 잃어버린 그 시간들을 재생해 내서 글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기억은 단순히 일상적이거나 상식적인 기억이 아닙니다. 하나의 상상력에 의한 허구가 덧붙여 지는데요, 이를테면 그 아름다운 모습과 광경에 풍부한 살을 입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프루스트의 예술관인데요. 현실과 미래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현실은 이윽고 지나가는 과거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프루스트는 과거의 꿈을 다시 현실에 되돌려 붙박아 두는 겁니다. 그럴 때 그는 진정 다시 살 수 있는 겁니다.

자, 이제는 문찬미씨가 어떻게 꿈을 통해 빌레깡의 추억을 소설 속에 재생하는지 소개하겠습니다.

" 빌레라는 말은 어린 나의 정수리에 가장 오래 박혀 있어 뭐랄까. 물빠진 스폰지의 푸석푸석한 맥빠진 기운, 또는 석면을 가지고 놀다가 손아귀에 온통 유리조각이 박혀 있을 때의 으스슥거리는 한기를 느끼게 하고, 유년의 절반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넓적빌레에 대한 나의 애착을 송두리째 거두어들이는데 한몫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넓적빌레는 마침 농번기를 맞아 기름칠을 해 둔 정미소의 녹슨 모터처럼 나의 추억 한구석에 윤택한 어린 시절의 몽상과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아름다운 문장 하나 더 인용하겠습니다. 

"드디어 석양이 비양도 너머의 수평선에 걸렸다. 낮동안의 작열하던 열기는 어디로 내빼 버린 것인지. 석양은 닳아버린 농구공같이 맥빠지고 부시시한 모습으로 수평선 아래로 농염한 오렌지색을 물들이고 있었다.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오렌지 빛은 황금색으로 변하였다가 이따금 바닷물의 푸른색과 혼합되어 금빛 나는 보라색으로 변하곤 하였다. 가끔씩 석양빛이 보라색으로 물들 때는 바닷물이 때마침 밀려오는 작은 파도에 요동쳐 흔들거릴 때로 한정되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순간, 나의 양미간을 강타하던 보라색 파문과 너무도 흡사한 그런 금빛 나는 보라색이 석양 아래서도 아름답게 출렁거렸다. " 

소년이 치루는 죽음과 삶의 고통에 대한 인식, 한 소년의 통과의례를 이 소설은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고, 다시 기회가 닿으면 소개하지요. 내내 즐거운 하루 되시길. (2001. 1. 12)

프루스트와 <창랑정기> 프루스트 깊이 읽기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김창석 교수가 번역한 정음사판 전집으로 7권에 이르는 방대한 소설이다. 게다가 현대 문학가운데서도 유난히 난해하고 까다로운 작품일 뿐 아니라 프루스트 특유의 지루한 문장과 세부적이고 사소한 사건 모두를 일일이 묘사한 까닭에, 사전에 작품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마음 준비없이는 십중팔구 도중하차 하기 마련이다.

전집 중 1권인《스왕네 집 쪽으로》는 이미 안면이 있던 터였으나 2권 부터는 몇 번이나 도중에 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좀더 준비를 확실하게 하자, 라는 생각으로 그동안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해설서와 비평집, 전기 등을 눈에 띄는 대로 구입하게 되었다.

로저 샤톡의 작품론, 셀레스트 알바레의 회고록, 앙드레 모로와의 전기를 겸한 훌륭한 해설집과 프루스트 연구가인 이형식 교수가 쓴 두 권의 연구서와 정음사판 전집이 바로 그 책들인데, 문득 책들을 볼 때 마다 과연 언제 모두 읽어 낼 수 있을까 하고 기쁨반 걱정반으로 고심중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고전들을 곁에 두고도 지적 게으름(대개 책읽을 시간이 없다는 식으로 변명하게 된다) 때문에 결국 읽을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가.

여러 종류의 작품 해설들을 접하다보면 반드시 "쁘띠드 마들렌느의 과자"와 "생루의 첨탑" 등 몇가지 중요한 삽화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직 전집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여러 작품론과 작가론을 대하다 보니 어느덧 몇 개의 에피소드들은 친근하고 낯익게 느껴졌다.

최근 유진오의 단편 〈창랑정기〉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이 소설은 화자인 작가가 어느날 자신이 태어난 고택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자는 고택 창랑정의 방문을 통해 장년에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문득 어린시절의 알싸한 향수를 맛보게 된다.

동시에 애틋한 추억은 화자의 삶에 기묘하고 충만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나는 회상체의 단편을 읽어가는 동안 문득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중의 "마들렌느의 과자"라는 삽화가 떠올랐다. 혹시 프루스트가 소설을 썼을 때의 느낌이 바로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사실 오늘, 나는 어느 순간 죽음에 직면할지 알 수 없다. 삶이란 특별한 의미는 없으며 미래 역시 불투명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에겐 오직 그가 살아온 과거만이 진정한 삶의 전부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자기'의 유일한 꼴은 기억이다. 지적 등가물(等價物)로 바꿔놓을 재창조야말로 예술작품의 본질 자체이다." "예술가의 소임은 그같은(기억속의) 희귀한 순간을, 그같은 순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튼튼히 고정시킴으로써 시간을 정지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 흘러가는 대로 흐르는 삶은 잃어버린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영원의 양상, 곧 예술의 양상밑' 에 옮겨서 되찾아 나타낼 수 있다. 그때 예술가와 인간은 똑같이 구분될 것이다."     - 앙드레 모로와 <마르셀 프루스트를 찾아서>

프루스트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이를 다시 재구성함으로써 비로소 실존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점이 바로 프루스트가 현대문학의 거장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신비로운 예술적 착상이다. 자, 그렇다면 필자 역시 프루스트를 따라 어린 시절을 잠깐 떠올려 보기로 하겠다. 프루스트와 나 사이의 특수한 문화, 사회적 차이를 뛰어넘어, 마치 프루스트가 생루의 첨탑을 회상하듯 나 역시 자연스럽게 어린시절 다니던 시골 교회의 허름하고 낡은 목조 종탑과 십자가가 세워져 있던 뾰족 지붕을 떠올려 본다.

지붕 아래쪽엔 머리가 회색빛인 여러 마리의 말벌이 살고 있었다. 그 중 붉은 색을 띈 벌은 숫벌이었고 회색빛은 암벌이어서 우리는 침이 없는 암벌을 손으로 잡는 등 장난을 치며 놀곤 했었다. 그 시절 주일날이면 교회에서 나누어주던 달콤한 껌의 알싸한 맛과 냄새의 추억(껌이 무척 귀한 시절이었다), 벼이삭 사이로 난 이랑의 송사리떼와 시큼한 앵두맛, 가을 들녘의 무밭 등 그 시절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보면, 어느덧 오랜 과거는 현실이 되어 나의 삶 속에서 새롭게 재생된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저 멀리 프랑스라는 낯선 이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내 곁에서 일어나는 낯익은 느낌으로 다가올 뿐 아니라 어느덧 현실로 뒤바뀐다. 프루스트의 소설이 비록 특수한 외국문학이지만 그것이 국경과 시대를 뛰어넘어 나의 정서에 울림을 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서이다. 난해하던 작품도 세월이 흘러 삶의 체험이 깊어지고 인생의 연륜이 쌓이다 보면 이해의 정도가 쉬워지기 마련이며, 때로 지적 성숙으로 난해함이 해소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한 작품을 읽기 전이라도 작품에 대한 정보들을 읽고 준비해 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이해의 가능성은 마련될 터이고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비록 난해한 고전이라도 정복할 날이 올 것이다. 아무튼 나는 여전히 마르셀 프루스트의 방대한 양 때문에 겁을 내고 있다. 그러나 얼마전에 앙드레 모로와의 전기《프루스트를 찾아서》를 읽은 후 상당한 용기를 얻었다.

프루스트에 대한 최상의 격찬과 작품 해설이 서술된 모로와의 전기를 통해 프루스트에 대한 나의 애정은 더욱 깊어졌고 언젠가 반드시 그 작품을 읽어 내리라는 계획을 세워보았다. 바쁘고 할 일 많은 일상을 생각하면 이러한 나의 계획은 너무 한가하거나 무모한 사람의 짓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치밀한 준비와 지속적인 애정이 없다면 과연 어떻게 고전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감나무 밑에 누워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게으르고 어리석은 자들은 이런 내 말과 생각이 전혀 수긍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감각적 쾌락에서 삶의 기쁨을 구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물질, 명예, 건강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는 동안에 정신을 시들어가며 지적 불감증에 빠져버린다. 현대인들은 단 몇 페이지의 책마저 넘겨볼 수 있는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러기에 나의 프루스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지나치게 한가롭거나 호사가의 해괴한 행동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도대체 사람인 이상 뭇 짐승들과는 다를진데 어찌 자신의 정신 세계가 황폐해져 감에도 이를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정신의 건강과 병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관심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때문에 다소 광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나의 프루스트에 대한 짝사랑이 결코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200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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