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비참할 정도로 편하다". 아내가 차려준 삼시 두 끼 - 한 끼는 직장에서 해결하므로 - 를 잘 챙겨먹고, 똥 잘싸고 잠 잘자며, 특별히 바랄게 없으니 꿈조차 꾸지 않는다. 출근하면 우선 커피 한 잔 빼들고 박지성과 이승엽을 화제로 노닥거리다가 대충 업무를 시작한다. 자나깨나 모범 가장이 목표인 나는 퇴근과 동시에 곧장 귀가해서 아내에게 하루치 소식을 자세히 들려준다. 물론 아내는 아내대로 상냥한 표정으로 수정이 엄마라든가 해나지오 이웃들, 아래 층 맛사지 아줌마 소식을 차례로 전해주고, 바지런히 주방을 오가며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 우린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봄비, 따사로운 아지랭이, 아흐, 베란다 가득 하얀 초롱꽃! 어쨋거나 요즘 나는 "비참할 정도로 편하다".
식사가 끝나면 아내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시청하고, 간혹 이웃집 소식이나 딸애 남자친구를 이야기 하다 열한 시가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든다. 아내와 단 둘만으로 충분하지만, 어쩌다 사람이 그립거나 입이 근질거리면 칼국수집 곽 사장이나 과일가게 수정이 아빠를 찾는다. 내 나이 또래인 그들은 하루종일 가게를 맴돌고 있던 판이라 어느 때고 따뜻하게 반긴다. 더 이상 꿈도 없고 바랄게 없으니 요즘 나는 "비참할 정도로 편하다".
허구헌날 책 속에 코박고 살았지만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다. 금요독회가 코앞인데도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는 겨우 10여쪽 읽었을뿐이다. 예전 같으면 전전긍긍 한숨을 내쉬고 밥이 넘어가지 않으려만 아예 걱정조차 하지 않는다. 내일이 마침 레인보우 밴드 연습 날이므로, 급한 볼일 있다고 핑계대고 삼학동 연습실로 달려갈 것이다. 따리 쿵쿵 따리~ 레인보우, 레인보우~ 무지개빛 레인보우!
모임 날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줄 알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앞뒤 꽉막힌 듯 융통성이 없으면 안 되니 적당히 둘러댈 땐 둘러대고, 대충대충 사는 게 현명하다. 역시 책 읽고 글쓰는것 보다 아내와 함께 가계부 꼼꼼히 살피며 우리 집 미래 설계하고, 트럼펫 불며, 맛있는 음식 먹고 이승엽과 박지성을 보는 것이 훨씬 즐겁다. 솜사탕 같은, 나긋나긋하고 몽롱한, 아흐, 알콩달콩 깨소금 나른한 일상이여..... 따분하기 짝이없는 지적 유희보다 다채로운 일상의 스펙트럼을 즐기자. 뜬구름 잡느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복을 향해 매진하자.
가능하면 교회에 나가 세상 시름 내려놓고 주님의 품 속에 안기고 싶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차마 교회만은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주일날 성장 차림으로 줄을 지어 교회에 가는 행렬을 볼 때마다 나는 길 잃은 어린양, 타락한 죄인인듯 찜찜해져서, 주문을 외우듯 맘 속으로만 위로하는 거디였다. 할렐루야~ 교회에 가는 것은 결국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인데, 나는 지금 비참할 정도로 편하고 행복하므로 하등 교회에 나갈 이유가 없지 않느냐하면서.
책을 읽지 않거나 글을 쓰지 않으면 고민할 것도 맘 아플 것도 없으며 후회할 것도 없다. 으레 그렇듯이 글을 쓰고나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거나 자책을 하기도 하지만, 아예 쓰지 않으면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너널널 느긋하다. 나랏일은 대통령이 알아서 해줄테고, 우리 동은 동장님이, 32통은 통장인 현서 할아버지가 알아서 해줄 것이므로 나는 내 집 단속만 하면 그만이다. 까짓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났으니 우리 식구 건사 하나 못할까.
그러므로 남을 참견하느니 내 일에만 몰두하는게 좋다. 나는 요즘 삼학동 레인보우 밴드에 나가 일주일에 두 번씩 트럼펫을 분다. 뭐니뭐니해도 속 편하고 즐거운 것은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에 몰두하는 일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면 씰데없이 이런저런 자책과 반성이, 지난 생활에 대한 후회가 밑도끝도 없이 밀려오지만, 아름다운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기면 세상은 한없이 평화롭고 아늑하다. 꿈결같은 선율을 내가 직접 연주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밥빱빠 빠아~ 체리핑크 맘보, 으라차차 끼엔세라 라꿈미 끼엔세라~ 어차피 나랏일은 대통령이 할 것이므로 나는 직장, 집, 밴드 일만 열중하기로 한다.
한 가지. 문화카페를 처음 시작했으므로 모른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 또한 대충대충 하기로 했다. 뭐든 융통성이 있어야 사람 좋다는 소릴 들을 것이므로, 오다가다 심심하면 카페에 들러 누가 어떤 글을 썼나, 뱁새 눈팅만으로 족할 것이다. 어쩌다 짦은 글이라도 있으면 누가 썼나, 어째서 이 글을 썼을까 요리저리 맘속으로 재보고 또 보면 될테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나서거나 참견할 일이 아니다. 여차했다간 책을 잡히므로 댓글이니 뭐니 피하고, 조심스럽게 읽기만 하는것도 좋을 것이다. 나이 오십중반이면 남의 눈치 재빨리 살필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입 단속을 잘 해야 한다. 오지랖 넓어봐야 괜히 구설수에 오르기싶상이니, 가능하면 듣기 좋은 말만 해야 교양있어 보이고 사람 좋다는 소릴 들을 것이다. 여하튼 나는 오늘은 물론이고, 무덤에 갈 그날까지 영원무궁 세세토록 비참할 정도로 편하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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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뎁혀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악을 이빠이 벌려서
눈이 흉하게 감기는 동물원 짐승처럼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식사,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 삶에 대한 상기,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 있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안을 헹구고(이 사이에 낀 찌꺼기들을 양치질하듯
볼을 움직여 물로 헹구는 요란한 소리를 아내는 싫어했다
내가 자꾸 비천해져 간다고 주의를 주었다)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소파!
<소파>하면 나는 <비누> 생각이 또 쓸데없이
<부드러움>이라는 형용사가 떠오르다가 <거품-의자>가 보인다
의자 같이 생긴, 젖퉁이 무지무지하게 큰 구석기시대의
이 다산성 여인상은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나는 이렇게 속으로 이렇게
영어식으로 말하면서, 그리고 양놈들이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소파에 앉았던 거디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거실이 번역극 무대 같다
중앙에 가짜 소파 하나, 그 뒤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세잔느풍, 정물화 한 점, TV 세트,
창을 향한 행운목 한 그루, 그리고 폼으로 갖다 놓고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서가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
다만 한 사나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소파에 앉았다
젊었을 적 사진으로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최근엔 입에서 나쁜 냄새까지 난다고 아내에게 비난받은 바 있는
이 사나이가 멍하니 소파에 앉아 동물원 짐승이 그렇게 하듯이
하품을 너무 길게 하고 눈물이 난 눈을 두 번을 깜, 빡, 깜, 빡하고 있을 때
무대 왼편(주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턱을 쓰다듬어 주면서 면도 좀 하라고 하자
그가 아내를 껴안으면서 「엄마!」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마터면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아내가 출장 렛슨 나가기 전에
그에게 와서 나를 어루만져 줄 때가 나는 좋다
나는,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컷트해 줄 때
낮잠 자고 있는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 나의 발톱을 짤라 줄 때
혹은 그를 자기 무릎에 눕혀 놓고 내 귓밥을 파 줄 때, 좋다
아침마다 그에게 녹즙을 갖다 주고 입가에 묻은 초록색을 닦아 주자
나는 그녀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 주고 목욕시켜 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 주고
똥도 받아 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코로 숨만 쉴 뿐, 꼼짝도 않고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해주는 식물인간이고 싶다
가끔 햇빛을 보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 줄 필요만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이 행운목
나는 이 병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나갔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서 놀았다
비계 덩어리인 구석기시대 어머니상에 푸욱 파묻혀서
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너무 많이 남아도는 나의 시간들이 누에 똥처럼 떨어졌지만
나는 수락했다, 이것도 삶이며
이제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
사람이 희극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므로 무위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격이랄까
사람이 만화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비록 사나이 나이 사십 넘어서 「내가 헛, 살았다」는 깨달음이
아무리 비참하고 수치스럽다 할지라도, 격조있게,
이 삶을 되물릴 길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 인정하기 조금은 힘들지만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
무위도식배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루 종일,
격조 있게, 놀았다
탄식하는 시계가 분침과 시침을 벌려
역광을 받는 공작새처럼 화사한 오후를 만들고
내가 손대지 않은 무구한 시간을 뜯어먹은 누에가
다른 종류의 생을 예비하는 동안
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
횡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 열대어 화석처럼 박혀 들어 있을 때
나는 내가 담겨 있는 공기족관을 느꼈다
거기서 나는 고기처럼 또 하품을 했고
MBC 뉴스 데스크에서는 전 해군참모총장이 검찰청 앞에서
검은 라이방을 쓰고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거디었다
내가 「오우 소파, 마마미야!」 외치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아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그녀는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했다
슈퍼마켓에 들렀는지 식료품 봉다리를 들고)
나는 오늘, 밥먹고 TV 보고 잤다
자기 전에 아내가 이닦고 자라고 해서 이빨도 닦았다
화장실 앞에서 전 해군참모총장처럼 포즈를 취했더니
아내가 쓸쓸하게 웃었다는 것도 적어야겠다
아 참,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았고 서울과 중부지방 낮 28도였다
내가 안방 문을 열면 무대,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가 외친다; 「지금, 옥수수밭에 바람 지나가는
소리, 들리지? 자 15층 아래 강으로 나는 가고 있어
밤에는 강이 긴 비닐띠처럼 스스로 광채를 낸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가련한 공기족들이여, 안녕, 빠이빠이! - 황지우의 시 <살찐 소파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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